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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명성황후는 계룡산 중악단을 복원했을까?
2013년 10월 04일  12:39:15 신유진 기자 news@gocj.net
   
▲ 한숭동 한국교통대학교 석좌교수

[ 한숭동의 세상 돋보기 ④ ]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경복궁 광화문에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작전명 '여우 사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낭인 자객 48명은 총성과 함께 일제히 황후의 거처인 건청궁에 난입했다.

이어 궁녀들의 비명이 들리고 끔찍한 살육이 시작됐다. 일 년 전 1894년 11월,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바로 그 일제의 칼날이었다. 명성황후는 잔인하게 시해된 후, 불에 태워 버려졌다.

그렇게 명성황후는 개화기 격변의 시대에 중심에 있다가 비통하게 숨을 거두었다.

조선말 세도 정치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시기. 웅크려 있던 용처럼 근근이 연명하던 흥선군은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왕의 처가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쇠락한 명문가인 명성황후를 왕비로 책봉했다. 동춘당 송준길이 명성황후에게 7대 외조부가 된다.  

구한말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달려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한가운데 있었던 명성황후(1851-1895). 명성황후가 고종의 부인으로 간택된 이유는 명문가의 후예이면서도 친정이 쇠락하여 별 볼 일 없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고종의 어린 시절, 아들을 대신해 국정을 대행하던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이 직접 정사를 행하도록 움직인 장본인이 자신이 간택한 며느리였음을. 며느리인 명성황후와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권력 갈등은 두고두고 역사의 안줏거리가 되곤 했다.

그런 그녀가 계룡산까지 와서 중악단을 복원한 까닭은 무엇일까? 과연 명성황후는 쓰러져 가는 조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제국주의 열강들과 맞서 싸우다가 일제의 칼날에 무참히 죽어간 진정한 조선의 국모였던 것일까?

# 계룡산, 신들을 위한 신전(神殿)

계룡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다. 계룡산은 민간신앙과 종교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대전 쪽에서 동학사를 거쳐 충남 공주에서 갑사로 들어가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굿 당, 암자 표지판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독교와 천주교의 기도원도 많다. 계룡산이 발산하는 영적인 기운이 무속이나 불교, 신흥종교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간 달리다 계룡산 기슭으로 난 왼쪽 길로 접어들면 곧 신원사가 멀리 보인다. 신원사 경내에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계룡산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절터가 있다. 동쪽에 동학사(東鶴寺), 서쪽 갑사(甲寺), 남쪽 신원사(新元寺)다. 북쪽에도 원래 구룡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폐사된 지 오래다. 지금의 상신리(上莘里) 주변이다. 상신리 버스 종점 바로 옆에는 과거 절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제법 큰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소설 '단'의 주인공 봉우 권태훈(1900∼94) 선생이 상신리에서 오래 사셨다. 1960년 대 후반 서울로 거처를 옮기신 후 약 30년 동안 종로구 효자동과 부암동에서 한의업울 하면서 주로 삼각산과 관악산을 오르시며 세상의 변화와 시국을 종종 예언하기도 했다.

우학도인 권태훈 선생은 대종교 최고지도자인 총전교를 역임하기도 했다. 묘소는 상신리 옛 본가 옆 대나무 숲을 잘 정돈한 곳에 모셔져 있다.

동학사, 갑사는 주말이면 유원지가 되는 대찰이다. 그 중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뜸한 곳이 신원사다. 계룡의 산사 중 가장 조용하다.

교통편도 한몫 한다. 대전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갑사나 동학사보다 찾아가는 길이 번거롭다. 그 번거로움으로 오히려 발길을 잡아끌게 하는 사찰이 바로 신원사이기도 하다. 신원사 주차장에서 사역(寺域)까지의 진입로도 아주 짧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노변에 주민의 집이 연이어 여러 채 있어서 마을 길 같이 여겨진다.

# 계룡산 중악단은 조선 왕조의 산신각

백제 시대 계룡산 제사 터의 위상은 확실하지 않지만, 통일신라는 전국의 5대 명산을 5악(五嶽)으로 지정하고 국가적 제사 터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토함산이 동악, 지리산이 남악, 계룡산이 서악, 태백산이 북악, 팔공산이 중악이었다.

5악 신앙은 고려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태조 왕건은 계룡 산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이라는 작호(爵號)를 내리기도 했다.

계룡산에서 가장 높은 해발 845m의 천왕봉을 등지고 있는 중악단은 조선 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계룡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왕조는 묘향산을 상악(上嶽), 계룡산을 중악(中嶽), 지리산을 하악(下嶽)으로 삼아 각각 상악단과 중악단, 하악단을 설치했다. 지리산의 제사 터는 남아있지 않다. 지리산 제사 터는 현재 노고단으로 추정한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계룡산 중악단(보물 제1293호)은 본래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 신단으로 건립했다. 성리학이 지배했던 1651년(효종 2년) 미신 타파의 목적으로 폐지되었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명성황후가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신원사에서 불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와 별개로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며 끊어졌던 계룡산 산신제는 1998년부터 민간차원에서 되살려 해마다 모시고 있다. 몇 해 전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석 선생이 집전해 의미를 더했다.

실제 중악단 경내에서는 소유자인 불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민간에서는 인접 공터에서 전통방식으로 진행한다. 어찌 보면 주객이 바뀐 셈이다.

 

#명성황후는 왜 중악단을 복원했을까?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의 산세를 높이 평가하여 신도안을 새로운 왕조의 도읍으로 삼고자 한동안 공사를 벌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17세기 들어서면서는 계룡산 신도안이 이씨 왕조의 400년 수도 한양에 이어 새로운 왕조가 800년 동안 도읍할 땅이라는 '정감록'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조선말에 이르러 사회적 불안이 증폭되면서 계룡산이라는 존재는 왕실에 적잖은 근심거리가 됐다. 명성왕후의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은 정감록의 예언이 두려웠다. 조선이 망하고 정도령의 나라가 800년을 간다는 그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일어선다.", "계룡은 정씨 800 년의 땅"이라는 참언은 조선조 중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후에 특히 널리 퍼졌다. 대원군은 팔도의 모든 정감록을 불온서적 취급하여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계룡산 출입도 금지해 버리고 신당, 굿당 들을 모두 헐어 냈다.

1873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명성황후는 조선왕국을 잇고자 계룡산 연천봉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 그가 순종이다. 1874년이니 정권을 잡고 1년 만이다. 그리고 1879년, 중악단을 고쳐 짓고 다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그녀는 계룡산 산신상이 모셔져 있는 중악단 본당에 앉아 어떤 기도를 올렸을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조선 여장부의 기개로 열강들에 맞설 힘을 기르기 위한 기도를 드렸을까?. 아니면 아들 순종의 무병장수와 조선의 앞날을 서원했을까?

명성황후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했던 것이다. 아마도 계룡산신의 힘을 다시 빌려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태조 역시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계룡산신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조선을 세웠다. 신도안(지금의 계룡대)을 새로운 왕국의 왕도로 정하고 궁궐의 주춧돌까지 놓았다고 하니 계룡산 신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명성황후가 중악단의 격을 다시 올리고 건물도 새로 지은 것도 정감록에 의해 새 왕조의 도읍으로 공공연히 일컬어지는 계룡산의 땅 기운을 억누르려는 의도였다. 이와 관련 계룡산 연천봉에 있는 등운암의 이름을 정씨를 누른다는 뜻으로 압정사(壓鄭寺)로 고치기도 했다.

'정감록'의 예언이나 왕실의 중악단 중건이 모두 계룡산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고도의 정치행위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

요즘 같은 난세에 명성황후가 다시 중악단에서 기도를 올리게 된다면 무엇을 서원할 것인지?.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상관없이 중악단은 한국 최고의 산신각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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