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영 한국커피문화협회 사무처장 ]  프랑스가 와인의 나라라면 영국은 홍차를 즐기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차는 녹차나무나 홍차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라는 단일종의 나무이다. 차의 종류는 이 나무의 잎을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중국의 차 분류법에 따르면 백차, 황차, 녹차, 우롱차(청차), 홍차, 보이차(흑차) 등 6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다양한 차의 종류 중에 유독 홍차가 영국인들에게 사랑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이유는 영국에 커피가 홍차보다 먼저 소개되었고 영국 내에서 한때 크게 유행하였지만 결국 홍차에 밀리게 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영국에서 홍차가 사랑받게 된 이유는 먼저 영국의 수질과 연관이 깊다. 한국, 중국, 일본의 수질은 거의 연수인 반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수질은 경수가 대부분이다. 영국의 수질도 칼슘과 마그네슘이 많이 함유된 경수이다. 일반적으로 경수는 커피의 주성분인 카페인이나 타닌의 추출을 방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칼슘이 많은 경수는 쓴맛을 부드럽게 해주지만 마그네슘이 많이 함유된 경수는 쓴맛을 강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영국의 물로 추출한 커피는 커피의 성분이 제대로 추출되지 못하여 밋밋한 맛을 내며 향도 거의 나지 않는다. 또한 자칫하면 쓴맛이 강해질 수 있다. 또한 영국의 물로 녹차를 우려내면 물의 색깔은 진해지지만 녹차에 포함된 타닌이 잘 우러나지 않아 특유의 떫은맛과 향이 약해진다. 반면에 발효한 차인 홍차는 경수로 추출하면 떫은맛을 내는 타닌이 적절하게 중화되어 적당히 좋은 맛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인들은 커피나 다른 차보다 홍차를 선호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커피하우스의 쇠퇴이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영국의 시민사회가 안정되어가자 정치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을 즐기러 커피하우스를 찾던 시민들의 발길은 뜸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불황을 겪게 된 수많은 커피하우스들은 문을 닫거나 술을 판매하는 등 ‘시민들의 교류의 장’이라는 고유의 색채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의 출입이 제한되었던 커피하우스와 달리, 여성 동반이 가능한 홍차 ‘티가든’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새로운 장소에서 사교클럽이 유행하게 되었고, 커피하우스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게다가 18세기에 들어서자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식민국가에 커피 재배를 시작하여 저렴한 커피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던 반면, 뒤늦게 커피 식민지 사업에 뛰어든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상대적으로 커피를 비싼 가격에 들여오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에서 고가로 들여오던 홍차의 가격이 안정되자 홍차를 과잉 매입한 정부는 홍차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커피의 소비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결과 매년 커피의 소비는 감소하게 되었고, 홍차의 소비는 점점 증가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커피의 나라에서 홍차의 나라’로 타이틀을 넘겨주게 되었다.

유럽에서 최초로 커피하우스의 유행을 이끌었던 ‘커피의 나라’ 영국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국가의 수질이 원인이 되어 ‘홍차의 나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불교용어인 ‘시절인연(時節因緣)’을 떠오르게 한다. 시절인연의 뜻은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일어난다.’이다. 지금은 비록 홍차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한 영국이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불교용어가 있듯이 (물론 사람의 인연을 뜻하는 이 용어와 정확한 뜻이 맞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커피의 나라로 다시 만날 시대가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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