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농촌 마을의 아들에게는 딱히 놀이시설이나 놀이 공간이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을 입구나 도로, 수확이 끝난 논, 공터에서 뛰어논다.

이들이 주로 하는 놀이로는 우리나라 여자 아이들이 하는 공기놀이와 비슷한 놀이로 갈대 줄기 등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다리위에다 올려놓고 공기놀이와 비슷하게 한다.

▲ 구슬치기 형제
또한 남자 아이들은 우리나라 구슬치기와 비슷한 놀이를 하는데 구슬은 진흙을 구슬크기로 동그랗게 해서 말린 구슬로 구슬치기를 하는데 멀리 줄을 하나 그어 놓고 진흙구슬을 일렬로 세워 놓는다.

순서를 정하여 한 사람씩 구슬을 굴려 줄에 있는 구슬을 밀어내는데 이 때 밀려난 구슬과 일렬로 서있던 구슬 중에 줄이 끊어진 구슬을 가져간다.

그리고 조금 큰 아이들은 공터에서 배구를 하거나 축구를 한다. 배구 코트도 대나무 두 개를 일정 높이로 세우고는 네트를 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그물을 가지고 동네 개울로 가서는 고기를 잡기도 한다.

이것이 캄보디아 농촌의 놀이문화다. 이런 이유로 봉사 팀에 빠지지 않는 것이 막대 풍선을 이용한 풍선 만들기이다. 막대 풍선을 불어 푸들도 만들어 주고, 왕관도 만들어 주고, 칼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면 아이들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뿌듯해 하면서 좋아한다.

▲ 캄보디아 축구
품마품몽 마을을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 아이들도 비슷한 놀이를 하는데 우리가 가져간 축구공으로 교회 마당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했다.

처음에는 경기 규칙을 몰라 공이 있는 곳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하고, 편 가름이 없이 아무에게나 공을 차기도 하고 심지어는 발로 차는 것이 아니라 공을 들고 뛰어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씩 손짓 발짓을 하면서 경기 규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공을 손으로 잡으면 안 되고, 공을 찰 때는 상대 골문을 향해 차야하고, 패스를 할 때는 같은 편에게 해야 하는 등을 가르치면서 한참을 재미있게 축구경기를 했다. 그러다가 슬쩍 한쪽으로 빠져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맨발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마당이 잔디가 깔린 마당도 아니었다.

잔자갈들이 즐비한 마당이었지만 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깔깔대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공을 차기에 바빴다. 축구공이 신기한 것일까? 아니면 이 아이들의 품성이 착해서일까? 공을 빼앗겨도 웃고, 멀리 공을 차내고도 웃고, 부딪쳐도 웃고, 그러다가 공이 담장 밖으로 나가도 아이들은 연신 깔깔대며 웃는다.

한참을 그렇게 축구를 하다가 지쳤는지 아이들도 하나 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아이들의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 캄보디아인들의 특징이 눈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의 눈은 천진난만한 어린 아기의 눈처럼 맑기만 하였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호수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켰다. 사탕을 주어도 두 손을 모아 어꾼이라고 하면서 웃고, 사진을 찍어도 웃고, 무엇을 해도 아이들은 어른을 경계하기 보다는 깔깔대며 웃기만 한다.

▲ 캄보디아 아이들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면 어떠랴, 옷이 남루하면 어떠랴, 집이 비좁으면 어떠랴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가진 것이 행복의 척도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만 이 아이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의 이 행복감이 평생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가지려고 남을 해치거나 속이지 않고 오늘에 만족하며, 현재의 부족함도 행복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이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아이들의 눈에서 어떻게 킬링필드를 찾을 수 있을까? 폴포트의 대부분이 소년병이었다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이런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기계가 되어 사람을 해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들을 살인기계로 만든 것은 바로 어른들이다. 이 아이들의 맑은 눈을 빼앗은 것이다. 이 아이들의 눈에는 남을 해칠 생각도 없고, 더 가지려는 생각도 없다. 그저 천진난만함 밖에 없다. 지금도 내 귓가엔 그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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