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소설가 한강(40)이 네 번째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를 내놓았다. 삶과 죽음, 우주와 천체, 고통과 집착 등 관념적인 코드들을 활자로 흩뿌려 놓은 소설이다.

한강의 소설은 회화적이다. 현재 속에서 섬광처럼 과거를 끄집어내면서 그림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대화보다는 감각적인 묘사에 치중해 추상화를 그리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미스터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촉망 받던 여자 화가의 의문에 싸인 죽음, 그것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1인칭 화자 ‘이정희’는 1년 전 겨울의 폭설 속 미시령에서 돌연사한 친구 ‘서인주’의 기사를 접하고, 친구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는 글을 쓴 미술평론가 ‘강석원’을 만난다. 그는 인주의 죽음을 예술가의 열정으로 포장하는 평전, 유고전, 미술관 등을 계획하고 있었다.

정희는 인주는 자살하지 않았다고, 반드시 증명하겠다고 다짐한다. 사랑하는 아들 ‘민서’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리 없다며 죽은 친구의 행적을 좇아 죽음에 가려진 진실을 찾아 헤맨다.

불규칙하게 등장하는 과거사들은 죽은 서인주를 설명한다.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인주는 병약한 외삼촌 ‘이동주’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우주의 비밀과 과학적 탐문에 관심이 많았던 외삼촌은 이합 한지에 거대한 먹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매달렸다. 정희 역시 외삼촌을 따라 천체 물리학 책을 탐독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애틋한 사랑을 키워간다.

시종일관 감각적인 문체와 묘사로 호흡하는 소설은 느리되, 더디지 않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진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는 영화의 몽타주를 연상케 하는 속도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의 불연속성은 우주와 닿아있다. 초신성의 폭발, 지구의 자전 주기, 상대성 이론 등 자연과학적 이론들을 문학으로 풀어내는 작가는 먹그림 속에서도 우주를 그린다.

‘그 시절의 수학 시간에 결코 이해해낼 수 없었던 숫자들이 있다. 0과 무한. 어떤 숫자든 0을 곱하면 블랙홀에 빨려든 듯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반대로 무한이 된다. … 우주가 태어났다는 것은 0이 스스로 무한이 되었다는 걸 뜻한다. 0이 변한 텅 빈 무한 속에서 0을 딛고 걸어가는 0 그것이 나라니.’(69쪽)

시각적 심상도 강렬하다. ‘검은 먹을 입힌 거대한 이합 한지 위에서 흰 별이 폭발하고 있었다’(29쪽), ‘검은 먹 속에 미량으로 들어있는 청색과 갈색이 엷은 농담 속에 번져갈 때’(95쪽), ‘그토록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별들. 그토록 거대하게 부풀어가는 0. 어디로 눈을 던져도 만나게 되는 암흑 아주 뜨겁거나 차가운 별들. 간결하고 아름다운 궤도들’(189쪽)

정희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상당수 풀어낸다. ‘왜 인주가 삼촌의 먹그림을 그렸는가. 그날 밤 미시령에 갔는가’(84쪽)…. 하지만 서인주의 생을 신격화하고, 자신의 열정에 미쳐 있는 강석원에 의해 테러를 당하고 만다.

‘삶 쪽으로 바람이 분다, 가라, 기어가라, 기어가라, 어떻게든지 가라.’ 390쪽, 1만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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