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내게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최성수의 동행이라는 대중가요이다. 가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행이라는 제목처럼 한 외로운 사람이 간절한 심정으로 함께할 사람을 찾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이웃의 동행이 되어주자는 외침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서에서도 창조주께서 처음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외로워 보여 그의 갈비뼈로 동반자인 하와를 만드신 것도 사람은 필연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간세상을 보면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보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뽐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안에 살면서도 내 이웃의 아픔과 좌절을 이해하기보다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승자들을 위한 사회, 가진 자들을 위한 사회, 그 사회에서 패자나, 없는 사람들은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기에 쥐죽은듯이 살아갈 것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특별한 사건이고 그런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여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행태는 경쟁만이 선이고, 승리! 만이 진리라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주위를 살피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통사람이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인정받고, 그들의 역사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에 ‘우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나와 너를 포함한 모두를 나타내는 말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지칭하는 좋은 말이다. 그래서 나의 집이 아닌 우리 집, 내 가족이 아닌 우리가족,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나라 등등 너와 나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하나인 우리로 표현한다. 우리라는 말의 어원은 ‘울이’로 울어주는 이, 울어줄 이라는 말이란다. 우리의 원래 의미는 함께 고통과 슬픔, 기쁨의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함께 살아갈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2009년 후반부에 쉼터에서 생활하면서 안정된 직업도 갖고, 저축도 한 분들 중에 어느 정도 자활의 기미가 보이는 가족들을 중심으로 안정된 주거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주거지원 사역을 주택공사로부터 16세대의 빌라를 위탁 받아 시작하였다. 이 빌라를 ‘울이공동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이 분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함께 울어줄 사람들이 필요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에서였다.

경제적 가난, 그 자체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 보다는 경제적 가난이 가져다주는 절망과 외로움이 더욱 그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실패자라는 낙인과 벼랑 끝에 내 몰렸다는 상실감이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노숙생활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사고와 자포자기의 심리상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혼자가 아닌 동행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가 동행이 되어주자는 것이 바로 ‘울이공동체’인 것이다. 울이공동체뿐만 아니라 사회가 경쟁만을 요구하여 서바이벌 게임처럼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구조를, 우리를 회복하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2010년은 함께 울어주고, 따뜻한 동행이 되어 주어 우리를 회복하는 한 해 가 되었으면 한다. 비록 사회가 천상천하유아독존만을 요구하더라도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사람이길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한다. 이것이 처음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본래 목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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