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의 산상수훈 첫 마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신학교 시절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부자에 대한 부정적 개념으로 하늘나라의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후 마음에 초점을 두고 진정한 부자는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나누는가에 있다는 미국의 속담처럼 욕심이 없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어 성경에는 이 대목을 承認自己靈聖貧乏(자기영성빈핍) 즉 내 안에 성령이 궁핍한 상태를 인정하는 것으로 영성에 관한 문제로 이해하기도 했다. 어떤 주석이 말씀의 본뜻에 가까운지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 말한 가난과 풍요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자기 검열과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 인! 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가난과 풍요 이 두 개념은 서로 상반된 개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삶에서는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있는 것 같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절대 궁핍함이 없이 가난은 잠시 불편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자족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많이 가지고도 늘 허기진 사람처럼 더 채우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가지고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신앙인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부흥이라는 미명하에 더 큰 교회, 아름다운 교회,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교회를 위해 사회적 책임이나 나눔에는 소홀한 교회, 좋은 집, 좋은 차 등등 물질적 풍요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자랑하며 이웃에 대한 관심은 적은 신앙인, 고든 코스비 목사의 지적대로 현대교회와 신앙인은 문화를 변화시키기는커녕 문화에 중독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문화에 중독되어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문화를 변화시키며 살고 있는가?

얼마 전 일이다.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에 받아보니 속편한내과의 류권호원장님의 전화였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희망진료센타 공동대표인 송관욱 선생님의 친구라는 것과 벧엘의집 개인 후원자 중에서는 고액을 후원하는 분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처음 그 분이 자기 신상을 밝히고 후원금 얘기를 꺼냈을 때는 조금은 긴장했었다. 혹여 후원을 중단한다고 하면 당장 후원을 중단한 만큼 살림살이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원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오면 순간순간 긴장을 한다. 그런데 그 분의 얘기는 정반대였다. 후원금을 배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금액을 후원하는데 더 올리겠다니 적잖이 걱정이 되어 우리는 한 번에 많은 금액을 하는 것보다 작은 금액을 오랫동안 후원해 주시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분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어느 날 환자가 자신에게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과소비가 아니냐는 것이란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환자의 말이 ? 쨈?것도 같아서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처분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한 달에 약 20만원 정도 기름 값이 절약되어 그 중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드는 비용을 제외하고는 좋은 일에 쓰고 싶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웬 과소비, 웬만하면 좀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을 가지려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인데, 대전에서 꽤 유명한 내과원장인 그가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이 과소비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동차의 배기량이나 차종, 아파트의 크기가 부의 상징이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처럼 되어 있는 판에 어떤 승용차냐도 아니고 아예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과소비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절약된 금액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쓰겠다는 것이다.

얼마를 가지고 있는가가 풍요의 척도가 아니라 얼마를 나눌 수 있는가가 풍요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는 우리의 소득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에 자신에게 꼭 필요한 비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하면서 40파운드를 벌 때는 28파운드를 제외한 나머지 12파운드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고, 60파운드를 벌 때도 32파운드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300파운드를 벌 때도 28파운드를 제외한 272파운드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각자 필요한 만큼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필요 외에 나머지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예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일 것이다.

지금도 내 귓가엔 그 선생님의 “그 돈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좋은 일에 쓰려구요”라는 말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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