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충전 시간 갖고 싶다"

허정무 감독(55)이 한국축구국가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허 감독은 2일 오전 10시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2010남아공월드컵 결산 기자회견에 앞서 대표팀 감독직 재계약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허 감독은 "부족한 저를 믿고 감독직을 맡겨주신 대한축구협회(KFA. 회장 조중연. 이하 축구협회)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며 "이 자리에서 내 입장을 바로 전달하는 것이 차기 감독 선임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팀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어 허 감독은 "물러나겠다고 말할 때 약간 떨렸지만,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후배 지도자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재계약 제의를 고사한 배경을 설명했다.

◇다음은 허정무 감독의 일문일답.

-결정을 내린 정확한 시기는 언제인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멀기도 하고,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주변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오늘 서둘러 발표하게 됐다.

-16강전을 치르기 전인가, 아니면 직후인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아공월드컵 본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코칭스태프들에게 "결과에 상관없이 본선을 마친 뒤 시간을 갖겠다"고 이야기를 해왔다. 본선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축구협회 관계자들께 이야기도 했다. 고민이 됐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이 내가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다.

-축구협회는 경험많은 감독이 대표팀을 길게 이끌어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연임을 제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려해보지 않았는가.

▲축구계에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대표팀 발전을 위해 나도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다. 대표팀 감독직이 부담되는 자리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분들이 있다고 믿는다. 후임 감독이 훌륭하게 팀을 이끌어줄 것이다.

-2014브라질월드컵까지 축구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싶다는 것이 유소년에 관심을 갖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이번 본선을 통해 느낀 것은 남미 팀의 우리의 벽이라는 느낌이었다. 과연 어떤 점을 보완해야 다음 월드컵,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이 있을까 생각해봤다. 체력과 정신, 조직력은 결코 뒤지지 않지만, 볼 터치, 패스, 순간 상황 판단, 영리한 플레이 등 개인기량은 뒤쳐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은 모든 축구인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점들을 연구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나는 축구인으로서 너무 많은 혜택을 받았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한국축구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축구발전을 위해 헌신할 생각이다.

-후임 감독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현재 대표팀은 다 능력있고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선수들로 채워져 있다. 앞으로 더 정진해주기 바라며, 후임 감독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굳이 여러가지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다시 프로축구계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가.

▲K-리그에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쪽으로든 축구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있을 것이다.

-2년 6개월 간 대표팀 지도자로서 힘들었던 순간은. 퇴임 후 하고 싶은 일은 없는가.

▲승부의 세계에 살다보니 승패 여부에는 어느정도 면역이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일이 그렇지 않은 일보다 많은 것 같다. 축구쪽으로는 남미팀을 꼭 뛰어넘어보고 싶고, 축구 외적으로는 아무 생각없이 쉬고 싶다(웃음).

-역대 감독 중 언론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지도자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언론에 대한 소회는.

▲언론에 대해서는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인터넷 댓글을 보다보면 선수나 지도자에 대한 비판이 보이기도 한다. 잘못을 했을 때는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인신공격은 상대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이런 풍토는 좀 바뀌었으면 한다.

-외국인 사령탑을 차기 감독으로 세우자는 의견도 있는데, 어떤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잘못 얘기할 경우 난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말하기가 곤란하다. 하지만 국내 지도자가 대표팀을 이끌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대표팀 감독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와 기뻤던 시기는.

▲중국에게 0-3으로 패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질 수도 있다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패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내 별명 쪽에 '오뚝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힘이 지도자에게는 필요하다고 본다. 본선에서 그리스를 이겼을 때와 16강 진출이 확정됐을 때 기뻤다. 선수를 지도하는 감독 입장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차기 감독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만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바람직한 범위 내에서 도울 방법은 있을 수 있지만, 전임 감독이라고 해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후임자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

-가족의 만류도 재계약 고사의 이유로 꼽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매번 마음고생을 하고 신경쓰는 모습이 미안했다. 그동안 해주지 못한만큼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다.

-선수와 지도자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에 대한 느낌은.

▲지난 세 차례 월드컵에서는 항상 후회가 됐다. 이번 월드컵만큼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시나 끝나고 보니 (후회를) 안하게 될 수 없더라. 나는 내 몸이 움직이는 한은 축구계로부터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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