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에 맞서 한국 독립을 지원한 일본인들

[후토이센진太い鮮人』제2호_1922.12./박열의사기념관 제공]
[후토이센진太い鮮人』제2호_1922.12./박열의사기념관 제공]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 애국장, 2018)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79~1953, 애족장, 2004)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가네코 후미코, 후세 다쓰지 선생을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가 5월 1일부터 31일까지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9살 때 한국의 고모부 집으로 보내졌다. 한국에서도 천대와 무관심 속에 자란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3월 충북 청주군의 3·1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1922년 박열과 만났으며 흑우회黑友會, 불령사不逞社 등의 아나키스트 단체에 참여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 등을 발표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경에 붙잡혀 심문받던 중 일왕 및 요인 처단 계획이 드러나자 자신의 사상과 실천 계획을 상세히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2월 26일 열린 대심원 1차 공판에서 박열과 함께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등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며 1926년 3월 2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회유목적으로 형刑을 줄이는 은사령恩赦令을 내렸지만 그녀는 문서를 찢어버리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1926년 7월 옥중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김희섭에게 보낸 서한_1925.1.18.]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김희섭에게 보낸 서한_1925.1.18.]

후세 다쓰지는 1879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에서 태어나 1899년 도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해 1903년 변호사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붙잡힌 재일 한인 유학생을 변호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 한인 학살의 진상을 조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조사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1924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했고, 1926년 법정투쟁을 벌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아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사망하자 가매장된 그녀의 유해를 되찾는 데 역할을 했다.

이후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봉건 지주층을 상대로 한 전남 나주군 농민들의 토지반환 투쟁을 도와 한국 농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저작권자 © 시티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