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3‧1운동을 이끈 사람들 – 이두열, 고석주, 김수남, 윌리엄 린튼

[이두열 李斗烈 1888 ~ 1954 / 함경남도 영흥 / 애족장(1990)

고석주 高錫柱 1867 ~ 미상 / 전라북도 옥구 / 애족장(1990)

김수남 金壽男 1900 ~ 1967 / 전라북도 군산 / 애국장(1990)

윌리엄 린튼 William A. Linton 1891 ~ 1960 / 미국 / 애족장(2010)]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군산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이두열, 고석주, 김수남, 윌리엄 린튼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군산 영명학교 학교 건물 사진 등 6점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 전시한다. ​

지난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군산 영명학교 졸업생을 통해 3‧1운동 계획을 들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멜볼딘 여학교 교사 고석주는 동료 교사, 학생들과 함께 3월 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각종 문서들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 전 발각되어 3월 4일 새벽 일제 경찰에 이두열과 고석주 등이 연행됐다. 

체포를 면한 다른 사람들은 거사를 하루 앞당긴 3월 5일 군산 3‧1운동을 전개했고, 일제는 헌병대까지 동원해 이를 저지했다.

이두열과 고석주는 각각 징역 3년과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지난 1912년 군산 영명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지난 1917년 교장으로 임명된 윌리엄 린튼은 군산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일제의 탄압을 목격했다. 

지난 1919년 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인의 저항을 증언했으며, 지역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에 한국의 상황을 기고했다. 

지난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윌리엄 린튼은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 

노동자로 일하던 김수남은 군산에서 3‧1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을 준비하며 노동자, 학생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군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방해로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자 김수남은 3월 23일 군산공립보통학교에 불을 지르며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출했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수남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정부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며 1990년 이두열, 고석주에 애족장, 김수남에 애국장을, 지난 2010년 윌리엄 린튼에 애족장을 추서했다.

 

군산 영명학교 학교 건물(1910년대)
군산 영명학교 학교 건물(1910년대)
군산공립보통학교 터-현 군산중앙초등학교 전경(2010)
군산공립보통학교 터-현 군산중앙초등학교 전경(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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