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영 한국커피문화협회 사무처장 ] 요즘 길을 걷다보면 상가건물 한 채에도 몇 군데의 카페가 보일 만큼 한집 지나 한집씩 카페가 있다. 도심 속 뿐만 아니라 도시 외곽에 시골까지.. 수없이 많은 카페들이 우리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판매하던 곳은 어디였을까? 아직까지 문헌상 밝혀진 우리나라의 최초 다방은 1900년 황성신문에 ‘커피를 파는 집’으로 소개된 ‘송교청향관’(松橋淸香舘)이다. 오늘날 카페의 모태가 된 ‘다방(茶房)’, 다방의 시작과 역사를 알아보자.

역사적으로 ‘다방’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식을 치를 때 '차'를 많이 활용했다. 그래서 고려 왕실에서는 궁궐 안에 '다방'이라는 관청을 세웠다. '다방'은 궁에 설치된 부서로 왕실의 의례나 외국 사신을 대접할 때 필요한 차와 다과를 관리하는 부서였다. 조선시대에도 다방은 왕실의 제례를 관장하거나 외국 사신을 대접하는 업무를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다시'라고 하여 차를 마시는 시간을 정해놓고 차를 마셨다고 한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전후 일본인들은 국내에 들어와 끽다점을 개설하였다. 끽다점은 우리나라의 다방에 해당되는 곳이다. 끽다점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거사를 행하기 전 대기했던 장소였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 대기했던 장소였으며, 1919년에는 강우규 의사가 남대문역에서 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상해를 입히기 전 대기했던 장소였다. 한편 1910년대에는 청목당, 조선호텔 등 커피를 판매하고 즐길 수 있는 곳이 생기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국내에 서양 문물이 빠르게 전해졌던 시기였다. 이때 다방은 모던의 상징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인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영화인들이 주로 다방을 개업하였다. 30년대 다방에서는 작품전시회나 출판기념회 등이 열려 마치 프랑스의 살롱문화와 비슷하였다. 40년대에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고, 다방에서는 강습회·기념회·전시회·출판회 등이 개최되었다. 50년대에는 한국전쟁 중 유일한 안식처이자 음악 감상실,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예술가나 문학가들이 명동으로 모여, 명동은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다방이 생기고 1950년대까지 다방은 유럽의 커피하우스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시인·음악가·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지식을 교류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발전에 기여했던 곳이었다. 많은 카페들 가운데 근처에 갤러리 카페나 음악 카페 등이 있다면 휴일에 방문하여 문화예술을 즐기고 마음의 풍요도 얻어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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