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서민의 아픔 아는 대통령 된다던 이명박

당시 이명박 후보는 경부운하는 정부의 지원없이도 건설이 가능하다며 그 필요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내가 이명박 당선자를 처음 대면한 게 벌써 재작년이다.

 

늦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06년 9월 7일, '전 서울시장' 또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불리던 이명박 당선자는 대덕구 오정동에 위치한 한남대학교를 방문해 성지관에서 1천여 명에 가까운 학생에게 강연을 했고 당시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신감 있게 열변을 토하던 이명박 당선자를 처음 취재 했었다.

 

그날 강연내용은 포항에서 고생했던 어린 시절과 현대 입사 뒤 고속승진 등 그의 저서 '신화는 없다'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나는 이명박 당선자의 강연 내용보다도 강연이 끝난 뒤 학생들과 가졌던 질의응답 내용이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의 이미지로 굳어진 채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가 강연을 끝낸 뒤 다섯 개의 질문을 받겠다고 하자 어떤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등록금 동결 주장'에 힘을 보태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한남대 학생들은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다.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다' 정도의 의례적인 답변을 예상했던 나는 이명박 당선자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학생의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건 안 된다. 현재의 등록금보다 더 많이 내서 학교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열기로 가득 찼던 장내는 한순간 서늘해 졌으며 학생들도 나만큼이나 당황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한 정당의 대선후보 중 한 명이라면 자리를 메워 준 학생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라도 '학생의 요청을 고려해 보겠다'라는 말은 고사하고 그토록 간단명료하고 강경하게 등록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명박 당선자의 당당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그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게 '기여입학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시 이명박 당선자는 5·31 지방선거의 완승으로 인기가 절정에 있었던 박근혜 대표에 비해 지지도가 열세이었음에도 한나라당의 유력 주자 중 한 명 이었기에 내 머릿속에는 그가 혹시라도 당선된다면 '부자들만 살기 좋아지는 세상이 되는 거 아닌가'하는 우려가 자리 잡았고 지금 그 우려가 현실화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강남이 부러우면 강남으로 이사 가라'는 우스갯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상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강남에 살 순 없는 것이다. 대신 대한민국 곳곳에 강남을 만들고 누구나 빈부의 격차로 인해 심하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육문제에 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으로만 봐서는 앞으로 최소한 5년은 틀린 거 같다. 이명박 당선자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뉴스를 보면 '수도권에서 돈 꽤나 굴리는 부유층'이 아니면 사람대접 제대로 받기도 쉽지 않을 거 같다. 오늘 오전에 들려온 소식도 우울하긴 마찬 가지다. 새 정부의 청와대 수석은 온통 서울대에 영남 출신이다.

 

'파이는 키워서 나눠먹어야 한다'는 국가 정책 때문에 대한민국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 맨게 반세기가 지났다. 그 덕분에 재벌은 수백 배나 덩치가 커지고 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하지만 그토록 고생했던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만 있다. 그리고 조만간 개선 될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기득권 세력들은 대한민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3위 안에는 들어야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내 놓을 태세다.

 

어느 한나라당 예비후보는 얼마 전 가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 같은 나의 지적에 '상대적 박탈감이 있을지는 몰라도 예전보다 잘 사는 건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서민들은 20세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인지 되묻지 못했다.

 

오죽하면 지난 대선에서 '지난 10년도 속았지만 누가 돼도 서민들이 삶이 나아지기 힘들다면 허경영 후보를 밀어보자'는 유머(?)가 먹혔을까.

 

완벽한 여유자금으로 펀드에 가입한 부유층이야 곤두박질치는 주식시황에도 아랑곳 않고 설 연휴에도 외국으로 골프여행을 다닌다지만 '펀드도 하나 가입 안했어?'라는 주변의 말에 자존심도 상하고 아이들 간식비라도 마련해 보려고 이 돈 저 돈 긁어모아 펀드에 가입한 서민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게 요즘이다.

 

물론 그게 이명박 당선자 책임이라고 하는 건 너무 억지지만 그만큼 서민들은 믿고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규모의 경제만을 신봉하는 재벌사 회장 출신의 이명박 당선자는 좌고우면도 없이 친기업적인 정책을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친 재벌'을 외칠 태세다. 대한민국에서 친재벌 정책이 드러내놓고 진행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새삼 논의하고 싶지도 않다.

 

각설하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명박 정부에 딴죽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쯤에서 이명박 당선자에게 지나친 친기업정책을 지양하고 서민들도 허리를 펼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는 '이명박 정부'가 돼 주길 진심으로 당부한다.

 

그것이 젊은 이명박이 이태원 시장에서 새벽 통행금지가 풀리면 리어카에 쓰레기를 싣고 삼각지에 갖다 버리는 고된 일을 하면서 꿈꿔왔던 세상이라고 믿어보면서.

 

당시 이명박 강연내용 전문

 

저도 여러분같은 좋은시절이 있었다. 오늘 우리 충청권의 가장 명문인 한남대에 오게됐다. 오기전에 총장님이 역사를 설명해 줬는데 오래전부터 한남 대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 역사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요즘 눈부시게 국제화되고 있다. 세계화 조류에 맞춰 세계와 교류하면 한국 대학의 좋은 표본이 될거라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 대학에 다니는 긍지를 가져도 되고 어느 곳에 가서도 자랑할만하다.

 

내가 한남대 홍보대사 역할 하겠다.

 

요즘 지방을 많이다닌다. 농업경영인 요즘 농민은 그냥 농민이 아니라 농업경영인인데 그들과 많은 얘기를 하고 전국에 있는 공단의 중소기업 하는 분들을 전국적으로 한 바퀴 돌면서 만났다.

 

부산에서 부터 낙동강 한강을 따라 인천까지 현장을 야영을 하면서 노인회관 마을회관에서 합숙을 하면서 전국의 민심을 알 기회가 됐다.

 

걱정 되는 건 현실이 어렵다는건 다알고 있다. 내일의 희망을 확실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 농업하는분도 농업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이길 수 있나 걱정하고 있다.

 

유기농법으로 이겨 보려는 젊은 농민도 있었다.

 

중소기업하는 분들 노력을 하고 있지만 어떤 중소기업 사장님은 '나는 죽어도 제조업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 너무 어렵다. 사람도 구하기 힘들고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중국 베트남으로 가던가 회사를 처분해서 재산 가지고 편하게 살고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

 

낙동강 하구 따라 올라올때는 밀양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서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SK에게 '앞으로 좋아지나요?'라고 질문을 하는 등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외국은 가스 석유도 많고 우리나라는 인구는 많고 나라는 작고 무슨 희망이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21세기 희망이 있는 나라라는걸 여러분도 느꼈을 거다.

 

대한민국에 과학기술이 있는건 유전이나 가스 있는것보다 희망이다. 세계가 개방됐기 때문에 국토가 적다는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구 4백만의 스위스에는 세계최대기업이14개 있다. 옛날 스위스 선조들은 감자만 캐먹고 낙농만 했는데 어려웠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큰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회사가 14개나 있다.

 

인구가 많아서 걱정하던 대한민국 인구가 줄어들어서 걱정하고 있다.

 

이 지구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식량은 부족할것이라고 했는데 식량은 줄어들지 않고 인구가 줄어들어 걱정하고 있다.

 

세계가 인도와 중국을 큰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다. 다보스 세계포럼 주제가 인도와 중국였다. 세계인구의 반이나 되는 두 나라의 발전이 세계의 어떤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두 나라가 발전하게 되면 세계에너지가 부족할것이다. 에너지 쟁탈전날것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환경이 파괴되서 세계 환경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이 두나라의 젊은이들은 상해나 북경가면 우리보다 더 발전되어 있지만 시골가면 20년전 수준밖에 안 된다. 인도는 더 말할것도 없다 아직도 하루에 1달러로 사는 국민이 중국 13%, 인도는 40%가까이 된다. 얼마나 가난하게 사냐.

 

그런데 이 두 나라의 젊은이들은 하루에 9백원가지고도 먹고 살기 힘든 나라인데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인도 젊은이는 세계 최강국이 될 날 멀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중국도 지금 현실은 형편없지만 언젠가는 미국을 앞서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이 있다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미래만 있다면 희망만 있다면 현재의 난관 극복 할 수 있다.

 

저는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 살았다. 시골에서 중학교 다닐때 6형제 다 공부시키는거 힘드니까 형을 서울에 대학 보내야 집안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형제들은 초등학교만 다니고 난 막내라 중고등학교만 다녔다.

 

난 꿈이 있었다. 언젠가는 남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갈 것이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길거리에서 돈을 벌때 길거리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얼마나 놀라고 창피한지 몰랐다.

 

뜻밖에 저희집을 찾아와서 어머니에게 고등학교라도 보내야 세상 사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살아간다고 말해 주셨다.

 

어머니는 형편이 안되서 보낼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계속 찾아와서 어머님을 설득시켰다. 시골에 있는 야간상고에 보내자고 설득했다. 비록 야간이지만 이 졸업장이 나중에 없는것보다 훨씬 낫다.

 

어머니는 등록금이 비싸다고 못 보낸다니까 낮에 벌 수있다고 하니 낮에 버는건 다른데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야간학교에 시험을 쳐서 수석을 하면 입학금 면제 되니 시험을 쳐서 1등하면 보내자고 설득 그 선생님 덕분에 야간상고 시험을 쳐서 1등을 하고 3년간 1등을 해서 졸업할 수있었다 2등했으면 중퇴 했을지도 모른다.

 

고3년을 수석했다니까 머리가 굉장히 좋은 줄 아는 데 솔직히 머리가 좋은 게 아니고 학교가 형편없었다.

 

야간학교에는 대학을 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이 공부를 특별히 열심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희망과 꿈이 없었다. 1등을 하더라도 시골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 학교 학생들에게는 희망과 꿈이 없었다 오로지 나만 목표가 있었다 1등을 해야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기때문에 다녔다.

 

목표와 꿈이 있다는건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등록금을 면제받아야 하기 때문에 3년동안 수석을 하고 졸업할 수 있었다.

부끄럽고 창피한 얘기를 말하는거다.

 

대학때 데모 심했다 군사정권 물러가라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했다. 학생회장 출마했다. 전 당선되리라는 생각 안하고 나갔는데 당선됐다. 1.2학년 후배들이 많이찍어줬다. 후배들이 다른게 있다고 찍어줬다. 다른게 있다면 군인들이 입는 군복을 검정물을 들여 3년 다녔더니 유명해졌다.

 

내가 환경미화원 하면서 다녔다는 거 아무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도 수십년 지난뒤에 알았다.

 

정부에 굴욕적인외교 하지마라 . 학생들이 데모를 얼마나 크게 했는지 모른다 그게 6.3사태다. 계엄령이라 군사재판 받았다.

 

내란선동죄 징역5년. 교도소에 들어가서 서대문 교도소에 들어가 있을때 단식을 하며서 독재정권물러가라 외쳤다. 어머님이 면회를 와서 저에게 다른말을 하지 않고 달동네 살면서 장사하던 어머님이 '너는 기도해라 성경을 읽어라 공부해라'세마디 했다.

 

저는 그때 기도해라 어머님이 독실한 크리스찬이니까 그런말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 졸업하면 호남권 DJ 영남 YS 충청 JP..

감옥에서 어머님 다녀간다음에 판단했다. 교도소 경험을 가지고 정치를 한들 무엇을 할 수있겠나 정권을 잡은들 내가 국가를 위해서 뭘 하겠나 해서 취직을 해서 일자리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게 내 소망였다.

 

대학을 졸업하니까 중앙정보부가 나를 대한민국에서 일 못한다고 만들어놨다. 대학을 졸업하고 6개월을 구석방에서 있다가 어느날 신문을 보니 현대건설 신입사원 모집광고를 봤다.

 

그 광고를 보면서 이런 회사면 정부가 설마 보내주겠지 들어갈 수있으면 여기서 일하다가 1,2년일하다가 중앙정보부가 해지해 주면 다른 좋은데로 옮겨가기로 하고 시험을 쳤다.

 

면접을 하는데 정주영 회장이 얼떨떨한거 같더라. 정 회장이 이군 합격하면 우리회사 올건가 묻더라 이게 무슨 면접이냐 합격통지지. 속으로 합격은 틀림없다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정주영 회장이 하나만 묻기 미안하니까 하나를 더 묻더라 '건설이 뭐라고 생각해'라고 묻길래 준비없이 간거라 건설이라는 것이 창조라는 생각이 떠오르더라. '건설은 창좁니다' 정주영 놀라서 '그래?' 너무놀라서 되묻더라.

 

정주영 회장이 그 말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얘기 할 수 있다. 재벌이 되서 자동차 조선이 나오고 전경련 회장이 되서 축사 강연을 가서 그럴때마다 빼놓지 않는 말이 '건설은 창좁니다' 일생동안 연설하면서 그  말을 하더라.

 

자기가 한 말로 알고 있는 것 같더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 그래서 그 회사에서 첫 월급 받을때 평생 하루벌어 하루 먹던 내 소원이 아무리 월급 적어도 월급받는게 소원이었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겠더라. 나는 비록 1-2년 있다가 옮길 생각이었지만 월급을 주는 것이 고마워서 열심히 일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니까 성과가 나오고, 재미있고, 잠을 3-4시간만 자고 일했다.

 

그 회사가 자동차, 선박 등 많은 계열사를 창업했고, 그럴때 마다 그 회사로 가서 일했다.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고, 다른 회사로 옮길 시간이 없었다.

 

즐겁게 일하는 데 병이 나겠나?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다. 회사 그만둘때는 16만8000명의 종업원이 됐다. 처음 들어갈 때는 90명 이었다.

 

첫 종로에서 국회의원 출마할 때 노무현, 이종찬 과 붙었다. 첫 선거구 출마할 때 노무현 전대통령... 아 지금 대통령이지,,, 아무도 나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나왔다.

 

결과는 노 대통령이 3등했다. 3등한 분이 나보다 먼저 대통령이 됐다. 3등했다고 실망할 필요없다.

 

서울시장이 되니 서울시민을 위해서 주어진 일을 했다. 저는 많은 일을 한 것은 많은 사람의 협력을 받아서 했다. 첫 출근하는 날 공무원들이 찾아와 공무원노조라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이 봉투안에는 공약인 청계천복원과 관련, 여당에게 갖다준 명단을 가지고 왔더라.

 

나중에 청계천 복원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공무원 교수 외부팀이 열심히 했다 공무원팀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는지 모른다. 봉투에 들어간 명단이 사람들 같더라.

 

코드를 맞추면 안된다 너와나 모든 힘을 모아야 발전이 된다. 내가 명단을 봤으면 '이명박시장이 봤다 큰일났다' 이렇게 되면 일이 안된다.

 

버스티켓 3,4,5번 갈아타도 공짜다.  서울을 발전시켰지만은 만불 소득 십몇년째 16 갑자기 6천불 올라갔다. 환율이 올라서다. 세계적으로 평균 6년이면 2만불인데 11년째 만불이다.

 

3,4만불 만들려면 수도권 하나만 가지고는 못 만든다. 충청권 영남권 호남권 광역 경제권을 만들어야 한다. 서울 수도권만 발전시켜가지고는 2,3만불 소득 만들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소득 220불일때 경부고속도로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자동차가 한대도 없었다. 외국에서 차도 없는나라에서 왜 고속도로를 만드냐고 차관도 안 줬다.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남북 통일을 할 수 있다. 대신 3,4만불 국민소득을 올리려면 모티브를 만들어야 한다. 저는 그것을 한반도에 운하라는 것을 만들어서 서울에서 충청도 호남 서울 거쳐서 신의주까지 가는 운하를 만든다는 것이다.

 

정부예산안써도 된다 모래 가지고 6-70% 나온다. 정부 예산 한 푼도 안 쓰고 수 많은 일자리 만들어낼수 있다.

 

요즘 양극화다 하는데 양극화가 중요한게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어 개인이 행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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