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운동에 적극 참여, 민족대표 33인중 천도교계 대표로 서명

양한묵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김정복)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민족대표로 옥중 순국하신 양한묵(1862.4.29~1919.5.16) 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양한묵 선생은 전남 해남군 옥천면에서 출생하여 여덟 살 때 양사재에 들어가 유학을 배웠고, 18세 때에는 불교·선교·천주교 등에 관한 서적 등을 두루 읽었다.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개화운동을 추진하다 일본에 망명해 있던 조희연·권동진·오세창 등과 교류하였으며, 동학의 교주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 귀국하여 친일파로 변절한 이용구에 대항하기 위해 윤효정·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입헌군주제의 실시와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헌정요의」를 저술하여《황성신문》에 연재하였다. 

 

  1909년 선생은 천도교 법도사(法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 교리서 편찬에 힘써, 『대종정의』『무체법경』등을 저술하는 등 천도교의 중심인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 2월 25일 손병희·오세창·권동진으로부터 독립만세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재동 김상규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1919년 5월 16일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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