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임시국회에서 유재중의원의 노숙인• 부랑인 복지법안, 이낙연의원의 홈리스 복지법안, 강명순의원의 노숙인• 부랑인 지원법안, 곽정숙의원이 홈리스 인권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등이 발의되면서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대안으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제정되어 통과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임시국회가 끝나고 나면 홈리스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사회에서 홈리스에 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IMF경제체제로 인해 실직노숙자들이 대거 출현하면서부터다. 그러나 홈리스지원에 대한 법령이 마련되지 않아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나 지원없이 대부분이 일시적인 보호에 머물렀다. 또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 홈리스에 대한 개념도 통일되지 않아 많은 혼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2005년 사회복지 사업법에서 부랑인보호에 노숙인을 추가하면서 어느 정도 통일적인 체계를 갖추어 가는 듯 했지만 부랑인은 중앙정부에서 노숙인은 지방정부로 보호의 의무가 나뉘면서 여전히 갈등과 혼란은 계속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볼 때 이번 노숙인 보호에 대한 법률이 제정된다는 것은 나름대로 홈리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이 마련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홈리스에 대한 규정에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홈리스에 대한 규정은 1987년 부랑인 보호법에서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탁한 사람,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보호를 원치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 시민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자,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 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 걸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부랑아, 불구폐질자”라고 규정했었다.

그러다가 2005년 부랑인 및 노숙인 보호시설 설치 운영규칙에 의하여 “부랑인이라 함은 일정한 주거와 생업수단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배회 또는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부랑인 시설에 입소한 18세 이상의 자, 노숙인이라 함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노숙인쉼터에 입소한 18세 이상의 자”라고 규정했었다. 

이번 법령에서는 “노숙인등이란 상당한 기간 동안 일정한 주거 없이 생활하는 자, 노숙인 시설을 이용하거나 상당한 기간 동안 노숙인 시설에서 생활하는 자,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홈리스에 대한 시각에는 대부분 건강한 사회에서 살 수 없는 범죄자이거나 사회 부적응자로 규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보호시설 등에 입소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 법령에서는 홈리스에 대한 규정이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하는 대상이 아닌 보호와 자활지원을 통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되어야 한다는 것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홈리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상당한 기간 일정한 주거가 없이 생활하는 사회 부적응 층이라는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국가차원의 법령에서는 홈리스에 대한 규정이 진일보한 면이 있지만 사회의 시각은 홈리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여전한 것 같다.

홈리스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홈리스라고 하면 하나같이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낭비벽이 심하고, 범죄자이거나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 등 사회의 부적응 자나, 이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로 규정한다.

그들은 정말 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사람들인가? 아니 무슨 전염병이라도 옮기는 사람들인 것처럼, 사회가 발전해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인가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르게 13년 동안 대전역 인근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인간적인 면모를 수없이 보았다. 분명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열등하고, 학력도 가진 사람들보다는 적고, 고상한 취미나 교양도 부족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것을 나눌 줄 알고, 큰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함께 모여 걱정해 주고 자신의 일처럼 달려들어 같이 해결하려고 한다.

벧엘의집 이전을 위한 공사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페인트칠이라며 낮에는 공사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와서는 늦은 밤까지 저녁도 거르면서 페인트칠을 하는 아주머니들, 전기만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열일 제쳐놓고 매일같이 돕는 이 0 0 아저씨, 타일공사는 자기에게 맡겨 달라며 다니던 인력도 잠시 쉬며 타일공사를 돕는 박 0 0 아저씨, 등 수많은 사람들이 벧엘의집 이전 공사에 자신들의 일처럼 달려들어 돕고 있다. 가진 것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기에 그 몸뚱이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회는 이 사람들에게 비록 손가락질을 하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향해 가자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감히 말한다. 당신들이 있기에 나는 행복합니다. 겉보기에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비틀거리는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나눌 줄 아는 넓은 가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기에 당신들과 함께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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