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10년을 보내고 희망차게 새해를 출발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희망으로 한 해를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갈등과 절망의 함정들이 있다.

남과 북은 지난 10년간 애써 가꾸어온 평화의 기운이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겪으면서 서해 한미합동군사훈련, 전쟁억제를 위한 군비 증강, 교전수칙의 변경 등 평화롭던 관계가 갑자기 군사도발을 일으킨 북한이 다시는 그런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응징해야 한다면서 전쟁상태가 되어가고 있으며, 4대강 개발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로 인해 뭇 자연의 생명들은 파괴되어 가고, 4대강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복지예산은 대폭 삭감되어 서민들의 고통지수는 늘어가고, 농민들은 지난해 자연재해로 생산량은 약30% 이상 감소하고 생산비도 못 미칠 정도로 쌀값은 폭락해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다고 하고, 구제역 파동으로 축산 농가는 불안에 떨고 있다.

반면에 경제지표상으로는 사상 유래 없는 수출 증가로 세계 7위의 수출국이 되었느니, 최대의 흑자를 냈느니 하면서 떠들어 댄다. 하지만 그것도 이익의 대부분은 몇몇 대기업이 독식하고 원자재 값 인상 등으로 납품단가를 올려 달라는 중소기업들의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만나는 사람마다 IMF 때만큼이나 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어느 해보다 안팎으로 갈등과 대결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올해 우리 벧엘의집은 “平和 누림이”라는 목표를 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사회적 갈등으로 평화가 깨져 대결과 단절, 반목과 질시,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기에 벧엘의집이 평화를 위해 일하고, 평화를 누려보자는 것이다.

혹자는 평화를 위해서는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강력한 법과 제도나 규범을 통해 통제된 사회가 되면 지금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을 수 있다. 중소기업이 불만을 터뜨리면 법과 제도를 통해 제제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문제제기를 하면 법대로 계약을 해지해 버리면 된다. 이렇게 강력한 힘으로 통제를 하면 그 힘에 의해 그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운 상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면 그것이 진정한 평화인가? 강력한 제도나 규범에 의해 질서가 잡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질서에 복종하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법과 제도, 규범은 소수의 권력집단이나 그 제도를 운용하는 집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모두가 평등하게 작용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평화는 위장된 평화에 불과하다.

平和란 禾쌀을 모든 사람의 口입에 平균등하게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평화는 너는 덜 일했고, 너는 능력이 부족하니까 덜 갖고, 나는 능력이 많고, 많이 일했으니 많이 갖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에 불만을 가지면 법과 제도로 통제하고 강제하는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 장애인이라고 차별받지 않고, 덜 가졌다고 무시당하지 않는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세상인 것이다.

그러기에 벧엘의집 구성원들은 2009년 새로운 벧엘을 향해 출발해서, 2010년을 자족을 통한 행복을 찾았고, 올해는 평화의 누리 꾼이 되어 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먼저 내가 평화로움을 느끼고 경험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혹자 내가 뭐 가진 것이 있다고 욕심을 버리라고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배제된 사람이 더욱 자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처럼 우리는 세상을 너무 계산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철저하게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버리고, 이익이 되면 집요하게 그것을 붙잡는다. 이러면 평화는 이룰 수 없다. 먼저 자신의 탐욕을 버리고 자신이 평화로운 상태가 되어야만 그 평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공존의 법을 배워야 한다. 자연과 평화하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소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과 사람이 평화로워지려면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편리를 추구하면 절대로 자연과 평화할 수 없다. 나의 편리가 곧 자연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와 좀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평화할 수 있는가? 다름을 인정해야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평화의 나라에 대한 이상을 뭇 민족 사이의 분쟁이 없어지고, 백성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어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칼을 쳐서 낫을 만들고, 더는 전쟁 연습이 없는 나라라고 말씀한다. 분쟁과 갈등이 없어지려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인 것이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당신의 오심을 포 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예수가 선포한 나라는 모두가 공존하는 사회 즉 평화의 나라인 것이다.

올 한해 우리 벧엘의집은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인정하며, 나누고, 갈등을 없애고, 공존의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평화의 누리 꾼이 되어 평화를 가꾸고 그 평화를 맘껏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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