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이대로 있다가는 유산을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할 것 같아서 아버지 생전에 자신의 몫을 나누어 달라고 졸라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끈질긴 요구에 걱정은 되었지만 재산 중 둘째 아들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하여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떠날 때의 생각과는 다르게 방탕한 생활에 빠져 끝내 모든 재산을 허비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그 마을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돼지를 기르는 인부가 되어 돼지 먹이인 쥐엄나무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신세가 된다.

비참한 자신을 한탄하다가 아버지에게 가서 품꾼이라도 되면 이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내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발견하고는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잔치를 베풀고 다시 아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동하며 그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한없는 큰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 이 비유를 읽으면 어떨까? 고대사회는 아버지의 모든 유산은 큰 아들에게만 상속된다. 우리사회도 아버지의 유산은 장자에게만 상속되지 둘째나 셋째 등 나머지 자녀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둘째는 장자가 아니라는 것으로 셋째나 넷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둘째로 태어난 아들에게는 첫째로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함께 어떡하면 아버지로부터 약간이라도 유산을 물려받을 길이 없을까를 궁리하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떼를 써서라도 일부 자신의 몫을 챙길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에 둘째 아들로서는 일부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이렇게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어쩌면 한 푼도 받지 못할 줄 알았던 유산도 일부 상속받았으니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자신의 몫을 챙겨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평소 꿈꿨던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도 많고 계획한대로 잘 되어가는 듯 보였지만 얼마 못가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갈 곳 없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 때 둘째는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이다. 처음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세상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며 말렸으면 이런 신세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아버지를 떠날 때나 지금 돌아갈 때나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신세보다는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잘못을 꾸짖거나 품꾼이 아닌 아들로 맞아 주신 것이다. 이것이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탕자의 이야기이다.

아침부터 김 0 0이 희망진료센타에 와서는 회의실 냉장고 청소를 열심히 한다. 먹다 남은 음식물, 오래된 음료수, 냉동실의 성애 등 냉장고 안팎을 청소하고 있기에 웬일이냐며 물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심심해서요.” 맞는 말이다. 그는 현재 심심할 수밖에 없다. 울안공동체에 돌아 온지 얼마 안 되었고, 다니던 직장인 야베스공동체도 그만 두었으니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베스공동체에서 일을 했었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몸도 약한 편이어서 대상포진이라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야베스공동체에 병가를 내고 치료를 받았지만 잘 회복되지 않는다며 입원치료를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병증이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여 울안공동체에서 쉬면서 치료를 받는 것으로 했다. 그런데 치료를 받던 중에 희망진료센타 실무자와 야베스공동체 사장에게 서운하다며 갑자기 울안공동체를 떠나 버렸다.

마음이 누그러지면 돌아오겠지 생각했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함께 출석하는 교회 교우들에게 병원에 가야하니 몇 만원에서 십여 만원씩 빌려달라는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무차별적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대상포진을 앓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씩 돈을 보내주기도 하고, 찾아오면 재워주기도 하고, 용돈도 주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담임목사님과 상의하여 다시는 그가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면 돈을 주지 말라고 하고는 일단락이 되었다. 이렇게 주위에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얼마 후에 다시 벧엘의집을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그는 둘째 아들처럼 자기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는 것만을 찾아 활용하는 비열한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남의 등을 치는 양아치와 같은 사람…….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벧엘의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자신의 행동이 미안해서 그렇든 정말 그의 말대로 심심해서 그렇든 중요한 것은 그래도 그에게 벧엘의집은 아버지의 품이 되었다는 것과 벧엘의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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