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약 4시간 30분을 비행하여 프놈펜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도 또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지고 간 짐이 문제였다. 의약품과 개인 짐들, 구호물품으로 카트마다 가득실린 짐을 풀어 내용물을 검사 하겠다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한 의약품과 구호물품이라고 얘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모든 짐을 풀어 보이라면서 그렇지 않으면 20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후진국들이 그렇듯이 캄보디아도 부정부패가 심각하여 무슨 민원이든 뇌물을 줘야만 해결된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에서 깜퐁츠낭으로 가는 도로가 정부에서 직접 포장한 도로는 울퉁불퉁하고 민간 기업에 위탁하여 포장한 도로는 매끄러운 것, 모든 민원에 급행세가 있는 것,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만들어 파는 것, 교장이 학생들이 타고 온 자전거에 주차료를 받는 것 등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 사회에서는 당연시 되고 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행어처럼 이런 현상을 ‘캄보디아니까’라고 말한단다. 하는 수 없이 20불을 쥐어주고 공항을 빠져나와 내일부터 있을 대 장정을 위해 예정된 호텔로 이동하였다.

다음 날 6시에 기상하여 캄퐁츠낭으로 가는 길에 우동이라는 곳에 들러 쌀국수로 아침을 먹었다. 이곳 쌀국수가 유명하다고 하기에 쌀국수와 우동이라는 마을이 뭔가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선교사님에게 물으니 믿거나 말거나라며 원래 우동이라는 곳은 옛날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주 음식인 우동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말한다.(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실제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식사 후 첫 진료 봉사지인 품마품몽이라는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나라의 행정구역 표기대로 한다면 캄퐁츠낭도 뜩포군 꺼발뜩면 폼마폼몽리로서 프놈펜에서는 태국방향인 북서쪽으로 약 3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마을이다. 이곳에 가려면 캄보디아 수도에서 시작되는 아시안 하이웨이로 깜퐁츠낭까지 약 2시간 정도 가야 한다. 말이 아시안 하이웨이이지 2차선으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 지방도로 보다도 못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을들은 이 도로에서 좌우로 곧게 뻗어 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형성되는데 폼마폼몽 마을도 아시안 하이웨이에서 좌우로 뻗은 비포장도로로 약 1시간 30분 정도를 더 가야 하는 곳이다.

한참을 가다가 갑자기 우리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정차하고는 모두 내리라고 하여 보니 앞에 개울이 하나 있었는데 개울 위로 간신히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고 차량은 개울 밑바닥으로 지나가야 했다. 다행히 건기라 개울에 물이 거의 없어 차량은 개울 바닥으로 건너고 사람은 나무다리를 통해 건넜다.(우기가 되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여 우기 동안은 외부와 소통이 거의 되지 않을 듯 보였다)

또 한참을 달려 목적지인 폼마폼몽 마을에 도착했다. 캄보디아는 우리나라와 반대로 70%가 평지이고 30%가 산악지대인데 이 산악지대도 대부분 라오스, 베트남 등 국경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드물게 내륙에 산악지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오랄산맥의 한 가지인 모텐산 부근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도 캄보디아의 대부분의 마을처럼 전기와 상수도 시설이 없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현재 그곳은 건기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탁이 되지 않은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제대로 씻지 않아 피부가 검은 것인지 씻지 않아 때가 낀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이들의 주 교통수단은 자전거이다. 봉사를 하던 폼마폼몽 교회가 마을 중심의 삼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1박 2일 동안 자동차는 한 대도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고 가끔씩 우마차와 오토바이만 지나다녔다. 식수도 상당히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집집마다 돌로 된 큰 항아리를 하나씩 놓고는 웅덩이의 물을 가져다가 침전시킨 후 사용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1박 2일 동안 약 450여명을 진료했는데 대부분의 환자들이 태어나서 처음 의사를 보는 사람들이었다고 하고, 이들의 건강상태는 아주 열악했다. 심지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젊은이는 우리나라의 보건진료소 같은 헬스센타에서 깁스를 했는데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아 세균이 뼈로 침투되어 썩어가고 있었다.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하는 수 없이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항생제 처방만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상설 센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더욱 우리를 절망하게 한 것은 잠시 짬을 내 마을 구경을(우리는 빌리지투어 불렀다) 갔었는데 어느 집에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보았다. 다행히 영어를 조금 하는 분이 있어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퇴행성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그 중에 한 분이 우리에게 바구니에 돈을 넣고 벽에 걸려 있는 걸게 그림에 향불을 피워 올리라는 것이다. 일행 중 윤환중 교수가 3불을 바구니에 넣고 향을 피워 그들이 하라는 대로 절을 했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묻자 그 할머니의 치유를 위한 기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이들은 환자가 생기면 병원이 아닌 우리나라 무당과 같은 사람을 찾아가 우리나라의 굿과 비슷한 치유를 위한 주술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어느 마을은 집집마다 대문 옆에 허수아비를 세워 놓았는데 그것도 그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그것을 막기 위해 세워 놓은 것이란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는 이 할머니에게 이 기도가 무슨 유익일 될 수 있을까? 지금도 그 할머니의 모습이 뇌리에 아른 거린다.

정신없이 첫째 날과 둘째 날 진료를 마치고 이동하여 설렁건달이라는 마을로 갔다. 이곳에서는 약 200여명을 진료했는데 전날 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는 마을이었다. 다행히 이 마을은 2년 전에 한 번 진료를 한 마을이었다. 그 당시에는 갑상선이 부어있는 환자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 그곳 목사님께 물어보니 지난 번 진료 때는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이었고, 이번에는 교회와 가까운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진료 후 함께 갔던 의사들과 갑상선 계통의 문제는 요오드가 많이 함유된 해초류만 많이 먹어도 어느 정도 호전된다고 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보았지만 딱히 방법을 찾지 못해 외면했었는데 이번에도 그저 그 환자들의 근황을 확인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외 이번 봉사활동에는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것은 쿡뉴스 편집국장인 장계원 후원회장의 제안과 준비로 진행되었다. 캄보디아를 상징하는 앙코르왓과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 꽃을 배경에 깐 대형 걸게 그림을 걸고 가족단위로 사진을 찍어 칼라프린터로 인화지에 인쇄하여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듯 서로 찍어 달라고 하여 쉴 틈도 없이 사진을 찍어 출력해서 나눠주었다. 그리고 동구청 공무원들로 구성된 자원봉사 단체인 ‘다솜회’에서 5년 동안 모은 기금으로 캄보디아에 깜퐁츠낭 안에 있는 공립학교 리모델링 사업을 진행하는 것을 협의하였다.(이 프로그램은 다음 봉사 일정에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이번 캄보디아 행은 아주 많은 추억꺼리가 있는 봉사활동이었다. 의료봉사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접목시키기도 했고, 향후 상설센타를 위한 지역 조사도 했으며,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사업에 대한 가능성도 보았다. 이제 향후 캄보디아 활동 비전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 같다.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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