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오늘 얼마 전 직장암 수술을 받고 요양병원에서 약 한 달간 입원했다가 퇴원한 이 0 0 아저씨가 저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그 아저씨의 첫 마디는 용서해달라는 것이었다. 퇴원한지는 며칠 되었는데 집 정리를 좀 하느라고 늦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용서받을 큰 잘못도 아닌데 그분에게는 큰 짐이 되었었나 보다.

사실 난 그 분이 언제 퇴원했는지도 벌써 잃어버리고 지나쳤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 건강하게 보였다. 뼈와 가죽밖에 없었던 얼굴에도 어느 정도 살이 올라 보기가 좋았고 몸도 많이 튼실해 보였다.

차 한 잔을 나누며 그동안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에게 이 분은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씀하신다.

자신은 처음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삶을 포기했었다는 것이다. 그 분의 말씀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처음 직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권했지만 장문의 편지로 수술을 거부하셨고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장례를 치러달라는 부탁을 했던 분이다. 그러나 말기 판정을 받고도 4년을 넘게 고통스럽게 지내시다가 수술을 받으신 것이다. 다행히 전이가 많이 안되어 수술경과도 좋았고 앞으로 예후도 좋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다.

열심히 잘 살겠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와 나에게 큰 절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하여 왜 그러시냐고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자리에 앉게 하고는 아저씨 왜 저에게 절을 하시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 분의 대답은 간단했다.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목사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겠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어떻게 목사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분에게 생명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요, 지금도 하나님이 그 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계신 것이지, 현실적으로는 그 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도 의사선생님이지 목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저에게 자신의 새 생명을 찾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당혹스러우면서도 정작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단순히 먹을 것과, 입을 것, 병을 치료해 주는 것,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 등등 벧엘이 하는 일의 중심에는 바로 생명살림이 있는 것이다.

먹을 것을 주고, 병을 치료해 주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은 바로 생명을 찾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 즉 본질은 퇴색되어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아저씨의 사건을 통해 다시 본질로 돌아갈 것을 깨우쳐 주시고 있는 것이다.

아저씨의 큰 절은 제가 받아야 할 절이 아니었다. 도리어 내가 그 분에게 큰 절을 올려야 했다. 망각의 강을 넘어 타성에 젖어 살던 나에게 당신의 큰 절은 초심과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큰 깨달음이었기에 오늘 나에게 그분의 큰 절은 또다른 큰 가르침이었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뜨거운 가슴은 식어지고, 부드럽던 감성은 딱딱해져 감동은 사라지고 오직 일만 남았던 일상에서 다시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 주신 이 0 0 아저씨 감사합니다.

제가 아저씨께 큰 절을 올립니다.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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