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인간의 불행은 호기심 많은 판도라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봄으로 그 속에 있던 증오, 불행, 파괴, 질병, 슬픔 등등 인간이 겪어야 하는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불행과 함께 상자 가장 밑바닥에 있던 희망이 있기에 인간은 그 절망을 견디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판도라의 상자 가장 밑바닥에 있던 희망이라는 놈이 아예 상자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처럼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온갖 경제지표들이 끝이 없는 수렁에 빠진 것처럼 추락하면서 경제는 위기를 넘어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서민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있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국민들을 현혹했던 정부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기보다는 세계 경제가 추락하면서 수출 의존형 경제구조인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부자들의 이익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정치권은 입으로는 민생을 말하지만 당리당략에 빠져 싸움판을 방불케 하고 있다.

10년 전 IMF경제위기 때는 정말 모두가 힘들어 어렵지만 함께 힘을 모아 국가부도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돌 반지며 패물이며 집안에 있던 금부치란 금부치는 다 모았었다.

그것은 누구의 강요가 아닌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오늘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 내일의 희망이 있다고 믿었고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국가도 나름대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내오려고 했고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했었다. 비록 직장은 잃었지만, 살기는 막막했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10년 후 지금은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정부도 사람도 없다. 이번 용산철거민 참사에서 보듯이 현 정부는 국민들과 고통을 나누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처음부터 강부자 내각이니, 고소영 내각이니 하면서 말도 많았는데 그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그야말로 서민들을 위한 것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종합부동산세 감세 및 환급을 위해 엄청난 세금을 낭비하더니 이제는 부동산 경기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부동산투기를 조장하여 집값이 내려가기는커녕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은 아예 포기하게 하고, 비정규직법 개악을 통해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놓인 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고, 4대강 유역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본가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이 어려워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없기에, 헤아림이 없기에 절망하는 것이다.

비록 힘들어도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 고통을 헤아려주는 곳이 있으면 그 고난을 이겨내 내일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오늘 일자리가 없어도 내일 상황이 나아지면 함께 일할 곳이 있다는 희망, 비록 지금은 내 집 한 칸 없이 지내더라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한 부동산 정책을 통해 시간은 걸리지만 언젠가는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돈이 없어 아이들 학원을 보내지 못해도 학교교육만을 통해 대학 진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고난은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은 그러기에 연대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고통을 나누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애써도 모두가 평등해질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정책이든 손해를 보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양보와 연대만이 이 사회를 희망이 있는 사회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헤아림과 연대는 찾아볼 수 없다.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헤아리지 못하고 어떻게 자본가를 나무랄 수 있느냐 말이다.

얼마 전 신문지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가 출근하는 통근버스에서 좌석을 구분하는 것을 사측과 임금협상에서 부가조항으로 넣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함께 출근하면서 먼저 승차하는 사람이 빈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한 곳에서 타는 것도 아니고 그 출근버스가 이곳저곳을 돌아서 공장으로 온다면 버스가 처음 정차하는 곳은 남들보다 더 일찍 준비하고 나와야 한다.

그런데 더 일찍 일어나 준비한! 사람이 비정규직 노동자이기에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미국에서 흑인노예와 백인이 버스를 구분해서 타고 다니던 것과 뭐가 다른가 말이다.

희망은 헤아림에서 출발한다. 같이 힘들어도 상대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 그 자리에 함께 서려는 것이 바로 희망인 것이다. 경제가 힘들고 일자리가 없을 때 서로 짐을 나눠지려는 노력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함께 희망을 말하고 싶다.

그래야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던 그 놈이 용기를 내어 뚜껑을 열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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