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얼마 전 이 0 0 아저씨가 충남대학병원에서 직장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다행히 수술도 잘 되었고 예후도 좋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수술 전 병문안을 하려고 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수술 다음 날 병문안을 갔는데 한쪽 팔에는 온갖 주사바늘을 꽂은 채 반갑게 맞이하신다.

주치의 선생님을 통해 수술경과나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함께 기도를 했다. 그런데 내 손을 꼭 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한다.

뭐가 그렇게 고마운 것일까? 수술을 도와준 것이 고마운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찾아와 준 것이 고마운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어쩌면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몇 년 전 직장암 말기로 인공장루를 시술해야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나와 인공장루를 시술할 것을 권유했지만 장문의 편지로 수술을 거부하셨던 분이다.

그 분의 이야기대로 한다면 인공장루를 시술하고는 쪽방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그것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아 사는 날까지 참아보다가 정 힘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해에는 상태가 점점 심해져 몇 번씩 병원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으며 간신히 버텨오시던 분인데 어쩐 일인지 갑자기 수술을 받겠다고 하신 것이다.

완강하게 수술을 거부하셨던 분이 무슨 마음의 변화가 있었길래 수술을 하겠다고 하신 것일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보겠다고 열망이 생긴 것일까? 그 분의 말씀대로 수술을 하든안하든 그 분의 삶의 그리 좋아지지 않는다.

수술을 하면 고통이 덜 하지만 대신에 인공장루를 매일 교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처음에도 수술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 그! 냥 버텨보겠다고 하셨는데...

어찌되었든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도 많이 안 되었고 수술도 잘 되어 예후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이제부터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이 분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비록 수술 이후의 삶이 불편하고 번거롭더라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 인생이기에 희망을 갖고 살자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을 지키실 것이라고 말이다.

수술을 했다고 그 분 생활에 무엇이 나아지겠는가? 질기게 살아온 인생이기에 소망보다는 늘 절망과 고통이 더 많았던 인생이 아니던가? 때론 질기게 붙어있는 숨이 끊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봤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그러기에 비록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은 것 같은 인생이더라도 함께 그 고통을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분에게 던진 “그래도 살아야지요” 라는 말에는 함께 살아보자는 희망을 담은 내 유일한 희망이다.

대신 아파해 줄 수는 없어도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여유만 있어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술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 있을 것들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들이니 현실로 닥쳐오면 어떻게 해결하며 살아가 보자구요. 이것이 당신이 자신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참 의미가 되길 바랍니다. 아니 나에게 당신이 던진 감사의 의미가 되었으면 합니다.

벧엘의집 원용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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