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지정한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소산성, 정림사지와 능산리고분군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남하한 백제 문주왕의 시련기를 극복하고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의 백제문화가 현대에 와서 새롭게 조명되는 백제역사유적지구. 동아시아 문명 형성에 기여한 백제의 역할이 생생한 이곳이 유네스코로 부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 2년여가 흘렀다. (재)백제세계유산센터와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충남관광협회가 주관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둘러보는 팸 투어에 참여한 관람후기를 3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부여의 상징인 부소산성. 부소산성의 관문인 부소산문에서 팸투어에 나선 기념 촬영

백제 흥망의 현장 사비성

-성왕의 천도로 백제의 수도가 된 사비성

▲ 삼충사에 모셔진 계백장군 영정
[ 시티저널 이명우 기자 ]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을 둘러본 뒤 공주한옥마을에서 전통차로 목을 축인 다음 발길을 돌려 부여로 향했다. 차창 밖은 어느새 농사가 시작되는 들녘의 고즈넉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오랜 만의 나들이라서 그런지 봄내음이 춘곤증과 함께 사르르 밀려왔다. 불과 30분정도 밖에 안되는 시간이지만 단잠을 잔 것처럼 부여에 도착하니 몸이 가벼워 졌다.

‘부여를 계승하는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정하고 강으로 둘러 쌓여 비옥한 반월형의 땅 사비로 천도한다.’

백제를 중흥시킨 성왕은 자신의 재위기간 절반을 공주에서 지내며 국력을 축적한 뒤 마침내 538년 사비(오늘날 부여)로 천도한다. 국호도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치고 잃어버린 한강유역의 구토 회복을 하기 위해 심기일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재위 36년만인 556년 신라와의 삼년산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1500여년의 풍파를 견딘 정림사지 석탑

▲ 1500여년의 풍상을 견뎌온 정림사지와 5층석탑
부여에서 백제유적과의 첫 만남은 정림사지였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이전에 몇 번 들른 적이 있어서 ‘뭐가 다르겠어’하는 마음으로 유적지에 도착했는데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해야 했다. 예전의 공원부지에 석탑만 덩그마니 놓여 있던 정림사지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우선 전에 없던 정림사지 박물관이 들어서 있었고 강당지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림사지 주변을 발굴해 금당지와 강당지를 비롯 연못을 구비해 완전한 사찰의 형태를 갖춤 모습을 구현했다. 그리고 기와를 쌓아 만든 와적기단은 예전엔 못 보던 모습이다.

정림사지는 백제로서는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의자왕은 긴급히 웅진성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좌평의 아들이던 예석진에게 포박되어 당나라 소정방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8월15일 의자왕은 정림사지에서 당나라 소정방에게 술잔을 올리며 항복을 표했다. 이로써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대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678년, 그리고 성왕이 사비로 환도한지 123년의 역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은 이곳 정림사지 5층탑에 백제를 평정한 기록을 남겨 ‘평제탑(平濟塔)’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치욕의 역사이긴 하지만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우리나라 전탑 양식의 변화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500여년의 풍파에도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백제의 향기를 품어내는 석탑은 완벽한 균형미를 갖춘 채 백제를 대표하는 탑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 숨결을 지닌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 사비성의 외성인 능산리 나성
정림사지에 이어 찾아간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능사와 나성 그리고 고분군이 이어진 능산리다.

능산리 고분군은 나성 밖에 위치해 있다. 당시 왕실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도심 한복판에 건설했던 왕릉들과는 다른 입지여건을 보여준다. 나성의 안쪽이 사비성이라면 밖으로 왕릉이 있고 고분과 나성 사이에서 백제시대의 절터가 발견되었다.

이곳이 능사다. 능산리 고분군의 주차시설을 만들기 위해 토목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절터 능사에서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동대향로가 발굴된다. 신선과 학, 그리고 5명의 악사가 연주를 하며 이에 맞춰 동물들이 춤을 추는 금동대향로는 당시 귀족들의 생활상과 복식 그리고 철학관등을 나타내고 있다.

또 ‘백제창왕명사리함’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이 능산리 왕릉원에 모셔진 왕족들의 명복을 빌던 사찰로 추정된다. 금강 가운데 부여주변을 흐르는 16km를 백마강으로 칭하는데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는 북,서, 남쪽을 백마강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였고 동쪽 부분만 트여있어 이곳에 나성을 쌓아 방어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사비 나성은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출현한 도시 외곽성의 가장 이른 예의 하나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

나성은 방어적 성격 뿐 아니라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로도 역할을 했다.

백제 대부분의 고분이 그렇듯 왕릉들은 모두 도굴되어 제대로 된 부장품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7기의 고분 가운데 1호분인 동하총에서는 사신도가 발굴되어 당시의 예술세계와 종교관등을 보여 준다.

아쉽게도 국립부여박물관을 방문하지 못해 금동대향로의 진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 능산리 전시관은 금동대향로를 비롯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동하총의 사신도 모형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 중국 낙양 북밍산에 묻혔던 의자왕. 그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태자였던 부여융 지석의 발견으로 그곳에서 흙을 가져와 단을 만들었다.
능산리 고분군 답사의 마지막 코스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와 그의 아들인 부여 융의 단을 둘러보았다.

나라를 잃은 비운의 왕 의자의 무덤은 이젠 찾을 수 없는 없게 됐다.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의 그 자리엔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당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의자는 낙양에 도착해 열흘만에 승하했다고 한다. (어떤 책에는 몇 달만에 승하했다는 기록도 있다.) 부여 능산리 의자왕의 단은 왕자 융의 유적이 발견 곳 인근의 흙을 가져와 조성했다.

부여융의 단과 사선으로 위치해 조성되어 있다. 부여 융은 의자왕에 이어 웅진도독을 지내기도 했다.

5월의 해는 길었다. 관람하느라 정신을 빼앗겨서 인지는 몰라도 어느 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능산리고분군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정림사지 인근의 한 식당에 들렀다.

부여 특산인 맛깔스런 서동한우로 볼거리에 이어 먹거리를 경험하고 숙소인 롯데리조트에 도착하니 어느덧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푸는데 다른 일행들은 리조트에 있는 아울렛에서 쇼핑을 한다고 나갔지만 오랜만의 나들이에 너무나 피곤해 그냥 잠이 들었다.

-새로운 백제, 백제문화단지

▲ 백제문화단지의 주 건축물인 사비궁의 입구,웅장한 정양문으로 천정문, 천정전, 능사의 탑 등이 건축되어 지난 2010년부터 백제를 찾는 관광객을 맞고 있다
 
이슬을 머금은 아침.

리조트에서 맞는 새벽의 싱그러움은 도시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주변에선 뜸북이와 꿩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책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늦은 조반을 마치고 리조트 옆에 위치한 백제문화단지를 찾았다.

▲ 12층 건물 높이로 능사의 절터에 있던 탑
1998년 4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2010년 말까지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백제문화단지는 당시 기공식에 참석했던 기억을 새롭게 떠올리게 했다.

경주에 버금가는 역사단지를 만든다며 시작한 그날의 기공식에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서리와 신낙균 문화관광부 장관 그리고 심대평 충남지사 등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나 방문한 이곳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물론 지장유물이 대부분인 백제의 모습이 신라와 같기는 어려웠지만 사비도성을 재현한 이곳은 경주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100만평 규모의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역사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17년간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조성됐다. 공공시설인 사비성(왕궁, 능사, 생활문화마을 등), 백제역사문화관,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민자시설인 롯데리조트등 숙박시설, 테마파크, 테마아웃렛 등으로 구성됐다.

이 중 2006년 개관한 백제역사문화관은 전국 유일의 백제사 전문박물관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을 비롯 기획전시실, 금동대향로극장, i-백제 체험장 등 다양한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백제문화단지는, 국내 최초로 삼국시대 백제 왕궁인 사비궁을 재현한 곳으로 왕궁과 사찰의 하앙(下昻)식 구조와 청아하고 은은한 단청 등 백제시대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여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에 근거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곳이다.

사비궁은 정문인 정양문(正陽門)과 천정문(天正門)을 지나 천정전에 이른다. 정사를 보던 천정전에 이르기 전 눈에 띠는 웅장한 탑이 있다. 중문인 대통문을 지나 만나는 탑은 원래 능산리 능사에 있었으나 이곳에 재현해 놓은 것.

오늘날 12층 건물 높이로 구성됐으며 중앙 탑신엔 5천돈의 황금이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크기다. 또 회랑을 지나면서 금동대향로에서 보였던 악사들이 연주하는 종적, 가야금 등 악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반월의 땅 사비, 낙화암의 전설

▲ 일제강점기에 신궁을 지으려던 자리에 들어선 삼충사, 백제의 세충신인 계백과 성충 흥수를 모신 사당이다.
백제문화단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백제 답사를 위해 부소산으로 향했다.

입구의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과 연결된 부소산은 백제 왕성인 사비여행의 정수다. 백마강으로 둘러쌓인 부소산은 낙화암과 삼충사, 그리고 고란사 등 여러 문화재를 품고 있다.

삼충사(三忠祠)는 본래 일본에서 신궁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신궁이 80%정도 완성이 됐을 무렵 해방을 맞았고 그 자리에 백제의 3분 충신을 모신 사당을 세웠다. 이곳에는 우측부터 성충, 흥수, 그리고 계백(본명 부여 승)이 모셔져 있다. 계백의 충혼을 기리는 삼충사를 지나 낙화암으로 향하면 반월루를 지나게 된다. 부여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성왕이 말한 ‘반월의 땅 사비’를 가장 잘 보여준다.

▲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시내 전경. 멀리 백마강이 반월처럼 흐르고 있다.
부여를 한눈에 담고 길을 재촉하면 낙화암이 나타난다. 낙화암위로는 부여문인들이 힘을 모아 세운 백화정이 있다. 백화정에서 소로를 따라 백마강으로 내려가는 길에 고란사가 나타난다. 고란초로 유명한 이곳에는 백의 관음상이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고란사에서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난 뒤 황포돗배를 타고 조롱대를 바라보며 백마강을 따라 내려가 구드레 나루에 이르러 부여 답사를 마감했다.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으신 박기훈 문화해설사님에게 이글로 감사함을 전한다.

▲ 국내 유일의 백의관음상이 자리한 고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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