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발굴 조사로 석성 확인…대전 산성 가운데 가장 주거지와 가정 밀접

▲ 월평동산성이 자리한 곳을 아무리 둘러 봐도 산성이라고 일컬을만한 것을 찾기 쉽지 않다. 2001년 발굴 조사에서 흙더미 아래에 있는 최고 높이 3m에 이르는 석성을 확인했다. 이 산성은 대전 산성 가운데 주거지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특징이 있기도 하다.

[ 시티저널 허송빈 기자 ] 계룡로를 따라 만년교를 지나 유성으로 가기 직전, 왼편에 월평타운 아파트 뒤편으로 야트막한 봉우리가 보인다.

대전 분지의 서쪽편으로 갑천을 따라 남북 방향으로 뻗은 전체 길이 약 6.5㎞에 달하는 월평 산지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해발 표고 137m의 봉우리, 바로 그곳에 월평동산성이 있다.

월평동산성은 봉우리의 능성과 서쪽 계곡 사면을 이용해 축조한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의 포곡식(抱谷式) 석축성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745m로 계족산성을 제외한다면, 질현성(迭峴城)이나 적오산성(赤鰲山城) 등과 함께 대전에 있는 산성 가운데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월평동산성이 돌로 쌓아 만든 석성이라고 하면, 의문을 나타내기 쉽다.

산성 현장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돌로 쌓은 성은 커녕 축대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버려진 산성에서라면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2001년 발굴 조사로 덮여진 흙더미 아래에 석성의 원본이 감춰져 있음을 확인했다.

현재 원형 훼손 우려로 다시 흙을 덮어 놓아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일부 구간 발굴이 이뤄져 전체 면모를 파악할 수도 없었지만, 최고 높이 약 3m에 달하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성벽이 분명히 남겨져 있다.

성벽은 입면 모양이 네모지게 다듬은 성 돌을 아래 위가 평행하게 쌓았다.

이와 동일한 기법은 501년에 축조한 부여 임천의 성흥산성(聖興山城), 6세기 전반 538년 이전에 완성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는 부여 사비나성(泗沘羅城), 부소산성(扶蘇山城) 북문지 남측의 성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어, 대략 6세기 이후 등장한 전형적인 백제의 축성법이라 한다.

월평동산성이 가지는 중요성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와의 연관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편의 일부를 발견했다. 이에 따라 이 일대를 고구려가 점유했다는 견해가 생겨난 반면, 유물 몇 개만으로 고구려 점령설을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월평산지를 따라 월평산성의 남쪽으로 1.1㎞ 지점의 마봉재와 3.4㎞ 지점의 도솔산(兜率山) 봉우리에는 각각 보루(堡壘)를 설치해 놓았다.

보루를 설치했다는 것은 본성인 월평동산성이 주변 관측에 다소 불리한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다르게 해석하자면 더 일찍 더 멀리 적의 동태를 파악해야 할 전략적 필요성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월평동산성은 대전의 산성 가운데 주거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다.

또 월평동산성을 아우르는 월평 산지 역시 주거지와 밀접해 평소에도 많은 사람이 등산로 겸 산책로로 애용하는 곳이다.

월평동산성은 비교적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성벽을 노출 또는 복원할 경우 지상에서 육안으로도 쉽게 조망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

이런 장점을 잘 이용한다면 문화 유적인 월평동산성과 인근 주민이 어울려 도심 속 또 하나의 생활 터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가능성도 기대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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