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0년 복원 마무리…뛰어난 경관 등 연계 때 더 많은 활용 전망

▲ 2022년 30년 가량의 복원 대장정을 마치는 계족산성은 주변 경관과 장동 산림 욕장, 황톳길 등과 연계 때 더 많은 활용이 점쳐지고 있다.

[ 시티저널 허송빈 기자 ] 대전 시민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산성 가운데 하나인 계족산성의 공식 명칭은 대전 계족산성이다.

국가 지정 문화재인 사적으로 등록되면서 혹시라도 있을 같은 명칭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앞에 '대전'이 덧붙은 것이다.

계족산성이라는 이름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鷄足山(계족산)'이 나오고 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각각 '鷄足山石城(계족산석성)'과 '鷄足山城(계족산성)'으로 기록하고 있어 대략 고려 시대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성내에서 '雨述(우술)', '雨述城(우술성)'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된 바 있어 이를 근거로 계족산성을 백제 시대의 '우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계족산성은 대전 분지의 동쪽 경계를 형성한 계족산지의 최고봉 423m 정상에 있다.

서쪽 정상부와 그 동쪽 사면에 걸쳐 성벽을 쌓아 전체 형태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전체 길이는 1037m로 대전 지역 30개 가량의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계족산성은 처음 성을 쌓은 주체가 누구냐에 오랜 논란이 있어왔다. 당연히 그 주체의 대상은 백제와 신라였다.

이후 수차에 걸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 결과를 근거로 6세기 후반경 신라가 처음 만든 다음 7세기초 이후 백제가 점유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성을 처음 쌓았다고 추정할 근거로는 6세기 후반경의 신라 토기가 발견됐다는 점과 성벽을 쌓은 방식이 대표적인 신라 산성인 보은의 삼년산성과 동일한 점, 산성의 전체적인 지세가 당시 백재 쪽인 서쪽을 감시하기에 용이하다는 점 등이다.

저수지에서는 사비 시기의 백제 토기, 서문지에서 연화문 와당 등이 출토돼 이후 백제가 점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연화문 와당은 607년에 조영된 일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와카쿠사(若草) 가람과 오오사카(大阪)의 시텐노지(四天王寺)의 연화문 와당과 흡사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또 일반적으로 와당이 왕궁이나 사원 등에서만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산성에는 그에 비견되는 인물이 책임자로 배치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도 있다.

계족산성은 여타의 산성과 마찬가지로 용도가 폐기된 이후 오랜 기간 방치돼 있었음에도상당한 규모의 성벽과 저수지 등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점이 국가 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계족산성은 1992년 정비 복원 계획 수립을 위한 정밀 지표 조사를 시작으로 총 2단계의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2년 최종 마무리할 예정이다.

사업의 장기화에 일부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외국의 사례를 들어가며 지금보다 더 오랜 시간 공을 들였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잖다.

약 30년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복원 사업 이후 계족산성은 어떠해야 할까?

계족산성은 지상에서도 관측할 수 있는 장대한 성벽과 함께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내려다 보이고, 서쪽으로는 펼쳐진 한밭 벌이 한 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관을 품고 있다.

대전팔경에 하나인 계족산에는 장동 산림 욕장을 비롯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황톳길도 있다. 이 꿰어지지 않은 서말의 구슬을 잘 엮어낸다면 많은 활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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